[스크랩] 의식족이지예절(衣食足而知禮節)

2015. 6. 12. 12:17보고픈 서화

청말근대 서법가 진보침(陳寶琛)의 행서(行書) <관중구(管仲句)> (1927年作)

 

倉廩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上服度則六親固  四維不張 國乃滅亡

下令如流水之原  令順民心

(창름실즉지예절 의식족즉지영욕

 상복도즉육친고 사유부장 국내멸망

 하령여류수지원 영순민심)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면 예의범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하면 영예와 부끄러움을 안다

윗사람이 법도를 좇으면 육친이 평온해지고

사유가 펼쳐지지 않으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으로부터 흐르는 물처럼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백성들의 마음을 따르게 한다

 

사기(史記)卷62 <관안열전(管晏列傳>/관자(管子)<목민편(牧民篇)>

 

- 六親: 부모형제와 처·자식.

- : 단단해지다. 굳어지다. 평안하다. 평온하다.

- 四維: (((()

 

 

 

※ ≪관자(管子)(二十卷)

 

- 흔히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衣食足而知禮節)고 말한다. 위의 구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인 듯싶다.

 

의식주는 삶의 기본 수단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절이나 법도 따위는 생존 다음의 문제다.

 

춘추시대에 다섯 개의 패권국(春秋五覇)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제()나라다. 주역은 환공(桓公)과 관중(管仲).

 

관중은 환공을 도와 그를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려 세웠다. 관중은 법가를 주장했고, 법치(法治)를 국가의 근본으로 내세웠다.

 

그는 국가 도덕의 근본은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 이것이 없으면 나라는 망한다. 이것을 세우기 위해서는 법이 있어야 하며, 상벌 또한 분명해야 한다고 했다.

 

공자(孔子)도 관중을 높이 평가했다.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몄을 것”(被髮左衽)이라는 말은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대변한다.

 

관중은 그의 벗 포숙아(鮑叔牙)와의 남다른 우정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유명한 관포지교(管鮑之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정을 나눠온 지우(知友)요 지기(知己)였다. 성장하여서는 잠시 다른 길을 걸었다. 관중은 공자 규()를 섬겼고, 포숙아는 공자 소백(小白)을 받들었다.

 

그러던 중 나라의 군주가 죽자 공자(자식)들이 군주 자리를 놓고 혈투를 벌였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공자들은 죽거나 이웃 나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관중과 공자 는 노()나라로 달아났고, 포숙아와 小白은 거() 땅으로 도망쳤다. 얼마 뒤 공손무지(公孫無知)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켜 군주인 양공(襄公)을 죽이고 자신도 백성들에게 피살되어 군주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누구든 먼저 귀국하는 공자가 군주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小白도 각자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두 공자가 귀국 도중 중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를 모시고 있던 관중은 길을 막고 기다리고 있다가 小白을 향해 활을 쏘아 그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小白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관중이 쏜 화살이 그의 혁대 고리를 맞혀 죽음을 모면했던 것이다. 다만 세 불리를 느끼고 죽은 척 누워있었을 뿐이다.

 

곡절 끝에 두 사람의 승계다툼은 小白의 최종 승리로 결말이 났다. 小白이 제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군주가 된 小白은 노나라를 협박해 를 죽게 했고, 관중은 포로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관중의 운명은 도마 위의 물고기 신세나 다름없게 되었다.

 

이 때 포숙아가 오랜 벗인 관중을 위해서 변론을 자청하고 나섰다. 관중은 유능한 사람이니 살려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에 환공이 대답했다. “그 자는 내 원수이니 반드시 죽여야 겠소.”

 

포숙아가 다시 말했다. “어진 임금은 사사로운 원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던 사람은 새로운 군주에게도 충성을 다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대왕에게 천하의 패자가 될 의향이 있다면 관중 같은 인물의 도움 없이는 어려울 것입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따라 관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포숙아는 직접 국경까지 나가 관중을 영접했다.

 

환공은 예를 갖추어 관중을 맞아들였고 그를 재상에 임명했다. 포숙아는 자진해서 관중의 아래로 들어갔다.

 

환공은 국사를 모두 관중에게 맡겼으며, 그를 중보(仲父)라 불렀다. 마침내 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어 춘추오패의 첫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훗날 관중은 포숙아를 두고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며 포숙아가 자신의 지기(知己)이자 지음(知音)임음을 밝혔다.

 

청말근대 화가 심심해(沈心海)<관포분금도(管鮑分金圖)> (1919年作)

 

청말근대 화가 이방원(李芳遠)<管鮑分金圖> 횡폭(橫幅)

 

근현대 중국화가 은재상(殷梓湘)<관중영영척(管仲迎甯戚)>

 

근현대 중국화 김협중(金協中)<관중여포숙아(管仲與鮑叔牙)> 삽도(揷圖)

 

출처 : 청경우독(晴耕雨讀)
글쓴이 : 경화수월鏡花水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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