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십팔학사등영주(十八學士登瀛州)

2013. 7. 8. 20:39보고픈 서화

※ 청말근대 화가 전웅(錢熊)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1925年作)


瀛洲旣登  功成名就
退老園林  琴棋詩酒
入我畵圖  左宜右有
絶後空前  千古不朽
(영주기등 공성명취
 퇴로원림 금기시주
 입아화도 좌의우유
 절후공전 천고불후)


영주에는 이미 올랐고
공명은 이루어 마쳤지
물러나 원림에서 늙으며
금기시주로 여생을 보내네
그림 속에 나를 집어넣으니
왼쪽이 마땅하나 오른쪽에 있네
뒤로 끊겼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남으리라


☞ 전웅(錢熊),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1925年作) 화제(畵題)

 

 

※ 남송(南宋) 화가 유송년(劉松年)의 <십팔학사도(十八學士圖)> 수권(手卷)

 
-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뛰어난 무장(武將)이었다. 일찍이 아버지 고조(高祖)로부터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무위(武威)을 떨쳤다. 그는 학문을 숭상하고 문학적 소양도 중요하게 여겼다. 


제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인 진왕부(秦王府/天策府)에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고, 두여회(杜如晦)·방현령(房玄齡)·공영달(孔潁達)·우세남(虞世南) 등 문재가 출중한 동량들을 골라 학사(學士)로 임명했다.


틈나는 대로 이들에게 정사(政事)를 자문하고, 고금의 전적(典籍)을 강론하는 등 문풍을 장려했다. 문학관은 나중에 한림원(翰林院)으로 승격한다.


당시 문학관에 망라된 학사는 18명. 이들을 十八學士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들을 선망하여 '영주에 올랐다'(登瀛州)고 했다. 이로부터 영주학사(瀛洲學士)·영주십팔인(瀛洲十八人)이라는 말도 생겼다.


영주(瀛洲)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곧 瀛洲山·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 가운데 하나인 瀛洲山을 일컫는 말이다. 문학관에 든 것을 영주산에 오른 것에 비겨  '登瀛州'라 한 것이다.


<十八學士圖> 또는 <十八學士登瀛州圖>는 당태종 때 문학관(文學館)에서 활동한 18명 학자들의 문회(文會)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북송(北宋, 960∼1127) 마지막 황제 휘종(徽宗, 1082-1135) 조길(趙佶)의 그림이 특히 유명하다.

 

우리가 흔히 보는 <십팔학사도>는 그의 그림을 임모(臨摹)한 후대의 작품이 많다.  

 

 

 

 

유송년(劉松年)<十八學士圖>

 

※ 청대(淸代) 화가 요지린(姚之麟)의 <十八學士圖> 권(卷)
 

※ 근현대 중국화가 유관영(劉冠英)의 <十八學士圖> 성선(成扇) (1932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풍운(馮耘)의 <十八學士登瀛州圖> 
 

※ 청대(淸代) 화가 여집(余集)의 <十八學士圖> (1799年作)
 

※ 청대(淸代) 화가 유란(喩蘭)의 <十八學士圖> (1822年作)
 

※ 근현대 중국화가 섭윤(葉昀)의 <瀛洲學士圖> 
 


※ 근현대 중국화가 이경(李耕)의 <十八學士登瀛州圖> 사병(四屛)

 

출처 : 청경우독(晴耕雨讀)
글쓴이 : 경화수월鏡花水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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