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에 작곡된 Piano DUO를 위한 작품(I. Vif. II. Modéré. III. Brazileira). 지중해 햇살같은 명랑한 라틴풍의 음악 스카라무슈는 원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입니다. 미요의 작품 중에서는 '세계의 창조'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애용되는 곡중의 하나입니다. 2대의 피아노용의 음악이 그리 흔하지 않은 것도 원인의 하나이나, 어찌되었든, 2대의 피아노 연주회에서는 빈번히 이것이 연주되며, 미요의 작품은 양이 많을뿐더러 내용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폭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시절 미요는 세계대전을 피해 브라질에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작곡가든 미지의 땅과 그곳의 인간생활을 접한다는 것은 인생 전반에 전환점이 될수있을 정도의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스카라무슈는 1937년 작품이니까 파리로 돌아온 한참 후의 작품임에도 역시 남아메리카의 리듬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수 있고, 청년시절의 브라질 체제의 영향은 만년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귀에 익은 산뜻하고 명랑한 정력적인 첫곡. 영화음악과도 같은 감미로운 멜로디의 두번째 곡. 3.3.2.째즈리듬의 (♩. ♩. ♩) 발박자 절로 나오는 삼바 풍의 마지막 곡. 오늘 스카라무슈 들으시고 한 번 수선스럽게 웃어보시지요.
Scaramouche 스카라무슈 (고대 이탈리아 희극에서 허세부리는 익살광대)
까만 의상을 입고 항상 기타를 들고 나와 비굴하면서도 허풍떠는 익살꾼 역을 일컬음.
미요(Darius Milhaud 1892.9.4~1974.6.22 프랑스)
음악에 자기를 표현한 서정 시인인 미요는 프랑스 6인조의 한 사람으로서 근대 프랑스 음악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위파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정열적이며 감각적인 면이 있어 커다란 감정의 발로를 찾아 수 있다. 한편 그가 남쪽 지방 사람인 탓인지는 몰라도 격정적인 성격인 반면에 고아하고 서정적인 면과 밝고 따뜻한 맛을 겸해 지니고 있다.
그는 3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7세 때 바이올린을, 12세 때는 그의 은사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재질을 보였다고 한다. 1910년부터 파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을 공부하였으며 1916년에는 브라질의 프랑스 대사관원으로 2년간 있으면서 브라질 음악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918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예술 운동에 참가하고 6인조의 멤버가 되었으며 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제2차 世界 大戰 때 그는 나치스의 압박으로 인해 미국으로 피신하여 캘리포니아 미르스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있었으며 1년에 한 번식 캘리포니아와 파리등을 번갈아 가며 교수와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는데 1959년가지 400곡이 넘는다 오페라<콜롬버스>, <볼리바르>, 교향곡, 협주곡, 무용곡,현악 4중주곡, 피아노곡, 합창곡, 영화 음악 등 많이 있다. 그의 작품이 프랑스적 이라는 것은 물론 재즈와 브라질 음악의 융합에도 무시할 수 없다.
드뷔시, 쇤베르크, 포레, 스트라빈스키 등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음악은 멜로디를 생명으로 했으며 조성은 인정하지만 무조 또는 다조의 경향도 있고 객관적이지만 다양한 리듬으로 생기에 차 있다. 그것은 라틴적이며 지중해적인 밝은 서정에 충만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