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Pyotr Il'yich Piano Trio in A minor, Op. 50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트리오 작품50번 (한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이 작품에서 어느 위대한 예술가란 다름아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원장이기도 했던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이 학교에 불러 교편을 잡도록 주선한 장본인 이기도 하고, 간간이 혹평을 아끼지 않기도 했던 스승이었다. 1881년 루빈스타인의 작고 소식을 들은 차이코프스키는 그때까지 한번도 쓰지 않았던 피아노 3중주의 형식을빌려 스승을 추모하기로 결심한다. 첫 악장은 비가적인 악장, 여기서는 차이코프스키의 멜랑콜릭한 성품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첼로와 피아노,그리고 바이올린이 한번씩 선보이는 첫 주제는 절품이다. 둘째 악장이자마지막 악장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피아노 3중주곡의 연주는 각기 이름 높은 세 사람이 모여 연주하는 것보다는 전문 트리오의 연주가 더 낫다. 그런 의미에서 수크 트리오의 연주를 추천한다.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에서 위대했던 선배를 추모하면서 쓴 이 곡은 차이콥스키의 휴머니즘이 알맞게 열매를 맺은 피아노 삼중주곡의 명작이다. 따라서 5편의 차이콥스키 실내악 작품 중에서 42세 때에 작곡한 이 곡이 실내악 부문에 있어 별로 그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했던 차이콥스키의 면목을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기념하기 위하여'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여기에서의 위대한 예술가란 모스크바 음악원의 설립자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차이콥스키는 한때 그의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일찍이 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 작품23에 대하여 혹평을 가해 내성적인 차이콥스키를 대단히 격분시킨 일도 있다. 그러나 그후 이 협주곡은 붤러를 비롯한 명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고, 또 차이콥스키의 작품활동이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므로 마침내 루빈스타인도 후배인 차이콥스키에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 한편 차이콥스키도 존경할만한 선배에 대하여 품어왔던 오해를 풀고 나중에는 오히려 존경심마저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878년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자 그의 탁월한 연주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이 곡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차이콥스키와는 여러모로 인연을 맺었던 루빈스타인이 파리에서 숨을 거둔 것은 1881년 3월 23일이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음악원의 초대 교장이었던 그의 후임에는 차이콥스키가 물망에 올랐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그해 11월 로마로 떠나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선배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여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삼중주곡의 작곡에 착수 다음해 1월 완성했다.
곡은 단 2악장으로 되어있으나 변주곡인 제2악장이 2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어 3악장 형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마지막의 변주와 코다(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부분임.)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부분을 이루는 대규모의 것으로 악상은 이미 모두 나왔던 것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제3악장으로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선배의 죽음을 애도하여 작곡된 만큼 그렇지 않아도 특유한 감상(感傷)으로 채색되고 있는 그의 음악은 이 곡에서 더욱 더 구슬픈 정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더구나 치밀한 작곡기교를 구사한 점에 있어서는 그의 실내악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특히 피아노 파트가 웅장하고 화려하게 작곡되어 있는데, 이는 당대의 유명했던 피아니스트를 기억하는 것인 만큼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작품이 완성된 해인, 1882년 3월 루빈스타인의 1주기에 즈음하여 피아노에 타네예프, 바이올린에 그리말리, 그리고 첼로에 피첸하겐의 연주로 비공개 초연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