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서 베토벤은 빈 주재 러시아 대사인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의뢰 로 제7번부터 제9번까지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한다. 소위 <라주모프스티 4중주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곡이 그것이다. 작품 59인 이 세곡에는 베토벤 중기의 원숙한 작법이 밀도 있게 집약되어 있다. 동시에 베토벤은 이 세곡으로 현악 4중주곡이라는 새 음악 양식을 확립하게 된다.
이 세곡은 그의 후기 4중주곡들과 함께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제9번은 <월광> 소나타나 교향곡 제5번 등과 맞먹는 대중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현악 4중주곡 중에서도 가 장 많이 연주된다. 곡 자체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 악장의 주제가 모두 명확하게 쉽게 받아 들여진다. 특히 3악장 메뉴에트에서 아타카로 이어지는 4악장은 푸가의 수법을 도입한 장려한 음악이다. 시종 빠른 움직임으로 숨막히는 긴장감과 약동하는 박력을 보이고 있어서 마치 교 향곡을 듣는 듯한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작품 59의 현악 4중주 3곡은 음악애호가이자 빈에 주재한 러시아 대사였던 라주모프스키(Rasumovsky) 백작에게 헌정되었다. 그는 유럽 최고의 악단으로 알려진 현악 4중주단의 제2바이올린을 맡고 있었다. 백작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베토벤은 1번의 피날레 주 주제와 2번의 3악장에 각기 다른 러시아 선율을 사용하였다. 1806년 여름과 가을에 작곡된 작품 59의 4중주곡들은 하이든의 작품 17과 20의 4중주곡들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곡들은 이 매체에서 작곡가의 특징적인 표현방식이 나타난 최초의 것들이다. 이 곡의 양식은 새로운 것이어서 음악가들에게 빨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주모프스키 백작의 연주자들이 F장조의 4중주곡(제1번)을 처음 연주하였을 때 그들은 베토벤이 그들에게 농담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클레멘티는 자신이 베토벤에게 "확실히 당신도 이 작품들을 음악으로 생각하지는 않겠지요?"라고 묻자 베토벤은 평소와 다르게 자제하면서 "오, 그 곡들은 당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오, 후대를 위한 거요"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하였다. F장조의 4중주곡의 알레그레토 악장은 특히 '미친 음악'으로 분류 되었다. 음악가들이나 청중들이 베토벤의 혁신이 합리적인 것이고, 그의 악상의 성격이 전통적인 어법과 형식을 수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웅 교향곡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 59의 4중주곡들에서도 소나타 형식은 다수의 주제들과 길고 복잡한 발전부, 제2의 발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규모와 의미를 갖는 확장된 코다 등으로 전대미문의 크기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확장과 함께 베토벤은 한 악장에서 전에는 명백했던 여러 부분들 사이의 구분선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 재현부는 위장되고 변화되며, 새로운 주제가 이전 재료에서부터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고, 음악적 사고의 진행은 다이내믹하고 추진력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정연하고 균형잡힌 형태를 실제로 경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가지고 장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베토벤의 제2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고 있으나, 그 변화는 덜 친밀한 교향곡과 서곡에서보다 4중주곡과 피아노 소나타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용출처 : 세광음악출판사 '서양음악사'
베토벤 현악사중주
이른바 베토벤 매니아들은 17개의 현악사중주 작품번호를 모두 외우고 있다. 그 숫자들은 18,59,74,96,127,130,131,132,135 그리고 다시 약간 앞으로 가서 133으로 끝난다. 그 개수를 세어보면 17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작품번호 18에는 6개의 작품이 들어있고, 59에는 3개의 작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숫자들을 애써 외우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베토벤 현악사중주라는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당신의 지적 욕망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외워지게 될 테니까. 물론 숫자는 의미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을 안내해주는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우선 18이라는 숫자는 베토벤 "초기"현악사중주 6개의 작품번호다. 현악사중주를 입문하는 학생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이지만 당신은 아마도 특별한 것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얼핏 들어보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즉 고전파 현악사중주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과 동시대사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베토벤 특유의 "혁신적 감각"을 여기서도 조금은 엿볼 수 있다는 것.
간략하게 각 작품을 연주해본 느낌을 달아보겠다. 주관적일 수도 있으나 곡 해설이나 분석이 아닌 순수한 느낌을 말해주고 싶다.
1번 (Op.18-1) : 서울현악사중주는 손가락을 매우 빨리 움직여야 하는 4악장을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2번 (Op.18-2) "인사" : 들어보면 정말로 인사를 주고받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전악장이 골고루 재밌다.
3번 (Op.18-3) : 전반적으로 아름다운 선율로 이루어진 곡이다. 미안하지만 평이하다.
4번 (Op.18-4) : 6곡중에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가장 베토벤답다라고 생각될 것이다. 적당히 무겁고... 하지만 SQ의 입장으로는 연주자에게나 관객에게나 그 이상의 어떤것을 주기엔 그래도 무리가 있다.
5번 (Op.18-5) : 연주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듣기엔 평범할지 몰라도.
6번 (Op.18-6) "멜랑코니아" : 4악장이 매우 슬픈 멜랑코니아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곡이다.
왜 이 작품까지를 초기라고 부를까? 절대 어렸을 때 작곡한 곡들이라서가 아니다. 이 6곡 이후, 러시아의 라주모프스키 백작에게 의뢰받은 7번을 작곡하기 까지 긴 세월의 공백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며 스타일이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중기"로 들어가면 여기서부터 걸작들이 나온다. 아주 유명한 3개의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가 있는데 이제부터 연주하기가 매우 힘들어 진다. 그 다음은 별명이 "하프"인 작품번호 74번, 그리고 중기의 마지막 곡인 96번은 일명 진지한 현악사중주라고 불리는 "세리오소"가 있다. 역시 이 곡 이후 상당기간 현악사중주에 손을 대지 않는다.
7번 (Op.59-1) "라주모프스키 1번" : 매우 어렵고, 매우 길고, 매우 파격적인(2악장) 곡. 연주자가 베토벤을 가볍게 여기고 이곡을 건드렸다간 큰코다치기 쉽다.
8번 (Op.59-2) "라주모프스키 2번" : 앞서 작품이 너무 길었다면 여기선 안심해도 된다. 그래도 연주하기 까다롭긴 마찬가지이며 아주아주 신나는 4악장이 있다.
9번 (Op.59-3) "라주모프스키 3번" : 이 러시아 시리즈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 분위기있는 2악장과 매우 화려한 엔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10번 (Op.74) "하프" : 들어보면 안다. 1악장에 나오는 피치카토는 정말 하프소리같다.
11번 (Op.96) "세리오소" :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악장의 선율은 매우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중기가 가장 좋다. 초기처럼 단순하지도 않고 후기처럼 어렵지도 않으며 나름대로 재밌고 베토벤의 혁신적 기법이 톡톡 튀기 때문이다. 이제 걸작중의 걸작 "후기"로 들어가보자.
9번 교향곡만을 듣고 베토벤이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경지를 느껴보지 못한 경우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9번교향곡 이후에 작곡되어진 6개의 현악사중주 때문이다. 선배작곡가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던 바그너는 베토벤조차도 9번교향곡과 6개의 후기현악사중주만을 인정했다. 다시말하자면 그의 "후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베토벤을 위대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이것이 베토벤의 작품인가를 의심하기도 하며, 더욱이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 17번인 "대푸가"는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음악에 익숙해진 20세기 음악인들까지 그 난해함에 놀란다. 아기를 위한 태교음악을 찾는 사람이나 차분한 클래식음악을 즐겨보려는 사람에게는 절대 권하지 말아야 하는 곡이다. 하지만 이런 파괴적인 곡만 있는 것이 아니다.
13번의 "카바티나" 악장은 현악사중주중에 가장 매력적안 악장이며, 14번의 스케르쵸는 너무 재밌다 못해 폭소를 터뜨리는 부분도 있다. 15번의 일명 "감사의 노래"라고 불려지는 매우 느린 악장이 있는데, 합창교향곡의 마지막 악장과 함께 배토벤의 대표작으로 꼽는 사람도 많다. 믿겨지는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12번 (Op.127) : 아주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찬 낭만현악사중주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곡이다. 하지만 다른 곡들의 위대함에 좀 눌리는 듯 하다.
13번 (Op.130) : 6악장짜리 곡인데 "사랑스런 사중주"로 불릴 만큼 전체적으로 예쁜 곡이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5악장 카바티나는 정말 소름이 끼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악장이 충격적이고도 이상한 "대푸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업자와의 피할 수 없는 마찰로 인하여, 좀 더 가벼운 악장으로 다시 쓰여졌으며 대푸가는 17번으로 독립했다. 그래서 CD를 사면 보통 13번과 대푸가가 함께 들어있다.
14번 (Op.131) : 총 7개의 악장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곡이다. 그 중 5악장 스케르쵸는 정말로 기발하며, 투병중이던 슈베르트가 이 곡을 듣고 병세가 더 악화될 정도였다고.
15번 (Op.132) : "병이 나은자가 신에게 드리는 감사의 노래"라는 긴 제목의 3악장은 길이도 길다(무려 20분). 이 곡을 이어폰을 꽂고 듣고 있으면 눈이 멍해지면서 허공을 응시하게 되고 눈썹이 찡긋해지면서 돌아온 날을 생각하게 된다. 또 마지막 악장은 원래 9번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위해 작곡되었던 곡으로 그에 버금가는 감동이 있다.
심원한 경지를 보여주는 제12번부터 제16번에 이르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 다섯 곡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제15번이다. 선율이 쉽게 귀에 와 닿고 서정적인 부분이 많으며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 곡은 제12번, 제13번과 함께 러시아의 귀족 갈리친 공작을 위 하여 작곡한 것으로 1825년의 작품이다. 곡은 모두 5악장인데 3악장 몰토 아다지오에는 '병에 서 회복한 자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성스러운 노래'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2악장까지 완성한 후에 병으로 작업을 중단했던 베토벤이 그 병을 극복한 다음 3악장부터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착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에서 회복한 베토벤의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절실하게 토로된 감동적인 음악이다. 인생을 깨달은 자기 내성적인 관조가 잘 표현된 이곡에 대하여 로망 롤랑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그의 인간성이 가장 깊이 스며 있는 작품 이다."
16번 (Op.135) : 베토벤의 너무나도 심오(?)하며 해석불가능한 질문과 답변이 있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 한다." 바로 이 곡의 4악장이 이 유명한 문구가 적힌 멜로디로 시작한다. 베토벤 자신의 작품세계에 던지는 심오한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소문처럼 가정부에게 밀린 월급을 줄까 말까에 대한 결정이었을까?
17번 (Op.133) "대푸가" 이 괴상하고 시끄럽고 난해한 곡은 앞서 말했듯이 13번의 마지막 악장이었다. 한 개의 악장임에도 불구하고그 길이가 무려 15분이 넘는다. 시작부터 연주자들의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는 5분연속 포르티시모!! 이곳을 통과하면 이번에는 3분짜리 피아니시모를 연주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극도의 긴장속에서 음악사상 유래없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돌진하는데... 스트라빈스키가 이 곡을 "영원히 현대적인 곡" 이라고 했을 만큼 충격적인 기법들로 가득한 이 거대한 곡에 대해서는 후에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들, 이것의 위대성을 먼저 접한 사람들은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