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레로(Boléro)는 라벨이 전위적인 무용가인 루빈스타인(Ida Rubinstein)으로부터 스페인 풍의 무용에 쓸 음악을 위촉받고, 1928년 10월에 완성했다. 같은 11월 28일,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루빈스타인 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이 곡은 스페인 무곡이지만 리듬이나 템포가 본래의 볼레로와는 다르다. 3개의 색소폰이 사용되어 진기한 편성을 보이는데, 작은 북, 비올라, 첼로의 피치카토로 독특한 리듬을 새긴 후 C 장조의 밝고 쾌활한 주제가 이 리듬을 타고 들려온다. 이 주제는 두 도막 형식으로 악기를 바꾸면서 반복되고, 이 주제에 응답하는 듯한 형태로 또 하나의 주제가 연주된다. 즉 이 곡은 하나의 흐름결꼴과 두 개의 주제를 반복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며, 가장 작은 소리에서 가장 큰 소리로 변화하는 '크레센도'(cresendo)만 사용되는 특이한 작품이다.
한 조의 주제가 이후는 동일한 리듬을 따르면서 조바꿈도 변주도 되지 않고 단지 악기 편성을 바꾸면서 8번 느리게 고조되고 반복된다. 전반부는 한결같은 유니즌(unison)으로 화성을 사용하지 않지만, 절묘한 관현악법으로 지루함으로 느낄 수 없는 곡이다. 악곡은 그대로 진행되고 끝 두 마디에 이르러 최초로 조바꿈이 일어나 클라이맥스로 끝난다.
「볼레로」의 전체 구성은 제1부(제1-75마디): 주제-제1변주, 제2부(제75마디-147마디):제2변주-제3변주, 제3부(제147-219마디):제4변주-제5변주, 제4부(제219마디-291마디):제6변주-제7변주 및 제5부(제291마디-340마디):제8변주로 이루어진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라벨은 파리의 뮤직 홀에서 유행하던 통속적인 스페인-아라비아풍의 댄스곡에서 착상을 하였다고 한다. 라벨은 이 곡에서 단 하나의 테마를 사용하여 이를 조금도 전개시키지 않고 리듬도 변화시키지 않고 임시 다른 악구도 삽입하지 않으면서, 전곡을 통해 같은 테마를 되풀이하면서도 조금도 청중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는 특수한 악기 편성으로서 이 테마에 여러 가지 색채를 주어 이 난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볼레로는 스페인의 무곡으로 1780년경 당시의 유명한 무용가 돈 세바스챤 세레소가 고안한 춤으로,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사용하여 현악기와 캐스터네츠의 반주로 연애의 흥분을 상상시키는 몸짓으로 보통 한 쌍의 남녀가 추는 것인데, 남자가 여자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또한 정감이 풍부하게 추게 되어 있다.
먼저 저음현의 피치카토를 타고 작은북이 극히 여린 피아니시모(pp)로 원래 볼레로의 리듬으로부터 조금 변형시킨 리듬 주제 2마디를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이 리듬은 끝맺음을 위한 마지막 2마디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끝까지 계속 되풀이된다. 단 갈수록 리듬도 악기가 더해져 점점 강하게(크레센도) 연주한다.
맨 처음에는 볼레로 리듬 주제가 2회(4마디) 피아니시모(pp)로 연주되고, 주제 가락 A와 B가 각각 2회씩 악기를 바꾸어 가며 점점 강하게 연주되는데, 그 사이 마다 볼레로 리듬이 한 번씩(2마디) 끼어 든다. 이것이 통틀어 4회 반복된 후에 마지막으로 A가 한 번 연주된 후 리듬이 나오고 B가 변형되면서 장대하게 곡을 끝맺는다.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 R 볼레로 리듬 주제가락A 주제가락 B ) R + [(R + A) * 2 + (R + B) * 2] * 4 + (R + A) + (R + B') 주제 가락 A는 다장조로 진행되는데 반해, 주제 가락 B는 바장조에서 바단조를 오가면서 진행된다.
Joseph Maurice Ravel 1875∼1937 프랑스 작곡가.
시부르 출생.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의 권고로 7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1889, 14살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다. 같은 해,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국정서(異國情緖)가 풍부한 음악과 접하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그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바스크인의 피와 맞물려서 그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97년부터 G. 포레에게서 작곡을, A. 제달주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 시기에 라벨은 스승 포레와 E. 사티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98년 《귀로 듣는 풍경》을 첫작품으로, 99년에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에스파냐 무용곡의 일종)》 등 이국정서가 넘치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로마상 콩쿠르에서는 4차례 모두 대상(大賞)을 획득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이미 신진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낙선 결과는 세론의 표적이 되었으며, 파리음악원 원장의 사직(辭職)으로까지 발전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물의 장난(1901)》 《현악 4중주곡(1902∼1903)》을 발표하여 새 세대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이 시기에 평생을 두고 존경하게 된 C. 드뷔시와 만났다. 그리고, 드뷔시의 숭배자인 시인 트리스탕 클링그조르의 시에 관현악 반주를 곁들인 가곡 《셰헤라자데(1903)》를 발표했다. 그 후 제 1 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피아노곡 《거울(1904∼1905)》 《밤의 가스파르(1908)》, 오페라 《에스파냐의 한 때(1907∼1909)》, 디아길레프의 의뢰에 의한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09∼12)》, 관현악곡 《에스파냐 광시곡(狂詩曲, 1907∼1908)》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1918)》, 가곡집 《박물지(博物誌, 1906)》 등의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후에, I.F.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하다>는 평을 받게 될 정도로 명석하고도 분석적인 구축력, 치밀하고도 미세한 객관성은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우렁차게 소리높여 부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그의 가곡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에는 활력 넘치는 문화상황에 고무되어 그는 재즈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국면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1막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1920∼25)》, 바이올린 소나타(1923∼27) 등을 발표하였다. 1927∼28년에는 미국 연주여행 후에 유명한 《볼레로》를 작곡하였고, 28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뒤 발레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볼레로 Bolero - Ravel, Maurice Joseph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에 관해서 말하기를 스위스의 시계기사라고 불렀다. 이것은 라벨의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 정밀하고 세부적으로 잘 설계되어 정확히 구성되어 있는 것을 비유해서 말한 것으로 라벨의 음악적 특징을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한가지, 라벨의 음악적 특색을 표현한 말로 오케스트라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근대 프랑스의 작곡가 중에서 오케스트라 악기의 사용법이 뛰어난 기량이 있는 작곡가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조곡 전람회의 그림을 오케스트라오 편곡하여 이름을 떨쳤고 그외에 수많은 뛰어난 오케스트라곡을 작곡하였다. 스페인 랩소디, 무용모음곡 마 메르 루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발레 모음곡 타프니스와 클로에 등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이름을 세상에 가장 널리 알린 곡은 볼레로이다.
이 곡은 현재 주로 연주회용의 작품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원래는 발레 음악으로서 구상 된 것이다. 명발레리나, 이다 루빈시타이을 위해서 쓴 무곡으로서 곡은 단순 소박하지만 고조되는 가락은 정열적이다. 라벨은 심심풀이로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작품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작품이 되었다. 또 한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라벨이 이 곡을 만든 방식 그자체이다. 어느 정도 큰 곡이라면 몇 개의 선율을 구성하여 거기에 변화를 붙이면서 하나로 정리하는게 보통의 작곡방법인데, 이곡의 경우는 그와 같은 음악의 상식을 무시한 채 특징있는 두 개의 주제만을 18회나 전혀 형상을 바꾸지 않고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리듬이나 템포가 바뀌지 않고, 바뀌는 것은 다만 주제를 담당하는 악기의 구성뿐이라는 것은 거의 음악 사상 전무후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곡은 저점 음량이 커져, 마지막의 겨우 2마디에서 정열적으로 분위기가 바뀌면서 끝난다. 참으로 스위스의 시계기사라는 말에 적합하게 완전히 계산된 작품이다. 또 악기 구성의 차이만으로 듣는 사람을 이끌 게 하는 점도 오케스트라의 마술사답다.
이 작품이 국립오페라 극장에서 초여되었을 때 열광적인 절찬을 받았고 그 후부터 이 음악은 세계 여러나라에서 다투어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 후인 1932년의 가을 , 57세의 라벨은 파리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그 때 머리를 세게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만년은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는 그 다음해 여름 무렵부터 심한 피로와 몸이 부자유스러움을 느꼈다. 의사의 진단을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병명은 알려지지 않고 뇌가 점점 위축되어 가는 일종의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에게 있어서 불행했던 것은 보통의 정신병의 경우와는 달리 이성 그 자체는 분명했던 점이며 단지 그의 머리 속에서는 음악이 울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5선지에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라벨은 폐인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작곡한 최종의 오케스트라 곡인 볼레로 역시 우연히도 그의 불행한 미를 예고한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