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30. 07:36ㆍ좋은 말 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작가;안톤 슈낙. 번역;김진섭)
<집 앞 바다. 베란다에서 찍은 사진.>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人跡)은 끊어져 거의 일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 그래서, 벽은 헐어서 흙이 떨어지고, 어느 문설주의 삭은 나무 위에 거의 판독(判讀)하기 어려운 문자를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될 때.
그 곳에 씌었으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所行)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혹은 하나의 허언(虛言),혹은 하나의 치희(稚戱), 이제는 벌써 그 많은 죄상을 기억 속에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鐵柵) 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憤怒), 그의 괴로움에 찬 포효, 그의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 미친 듯한 순환(循環),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대의 동무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우러러볼 만한 사람의 고관 대작(高官大爵)이요,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의 몸으로서,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한 시인(詩人)밖에 못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그러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고요한 음악. 그것은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에,모래자갈을 고요히 밟고 지나가는 사람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한 곡절의 쾌활한 소성(笑聲)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어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하는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예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찬란하고도 은성(殷盛)한 가면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을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십 오 세의 약년으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는 잠들다."라고 쓴 묘지명을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적의 단짝 동무의 한 사람.
날이면 날마다 언제나 도회의 집과 집의 흥미 없는 등걸만 보고 사는 시꺼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첫길인 어느 촌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거리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살거리는 음성이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 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낄 것이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 어렸을 적에 산 일이 있던 조그만 지방에, 많은 세월을 경과한 후에 다시 들렀을 때. 아무도 이제는 당신을 아는 이 없고, 일찍이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가옥들이 늘어 있으며, 당신의 본가이던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왕자같이 놀랍던 아카시아 수풀은 베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 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 번째 덜어진 광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묻은 서류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白雪) -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안톤 슈낙 (Anton Schinack, 1892~1973) 독일 표현주의 작가. 그의 글들은 서정과 낭만으로 가득차 있으며, 사물을 관찰할 때에도 그 섬세한 시선과 감각이 돋보이는 문체로 환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의 작품 중 詩나 小說보다는 수필이 독자에게 잘 알려져 있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필로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내가 사랑하는 소음, 음향, 음성들〉 등 |
*김진섭 (1903. 8. 4. -?) 수필가, 독문학자, 전남 목포 출생. 호는 청천(聽川), 1927년 일본호세이대학 독문학과 졸업. 유학시 <해외문학> 창간에 참여. 1931년에 유치진 등과 극예술연구회 조직. 귀국후 서울대 성균관대 교수 역임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 《생활인의 철학》《인생예찬》《교양의 문학》 |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1953년 고교 국어 교과서에 처음 실려 1982년 교과서 개편으로 사라지기까지 30년 가까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수필을 배운다는 것이 행복하여 외우고 또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다시 읽어 보고 싶을 때는 저장하여두고 꺼내 보곤 하였던 글입니다. 이 글이 종적을 감추고 만 사실에 대해서 한 원로 언론인은 어느 잡지에 이렇게 기고 하였습니다.
"교과서에서 명문(名文)의 시대는 1970년대로 끝났다. 이리하여 국어(國語)의 황량한 풍경은 개막됐다. 이제 국어 교과서의 문장(文章)들은 아무런 감동도, 감명도, 감흥도 주지 않는다. 혈색마저 잃은 빈혈(貧血)의 범문(凡文)만이 행세하고 있다. 명문(名文)을 읽지 못하는데 명문(名文)이 나올 리가 없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교과서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장 좋아하는 산문작가로 안톤 슈낙을 꼽았던 작고한 동화작가 정채봉님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합니다. 김진섭선생님의 격조 높은 번역 덕분에 산문이라기 보다는 서정시에 가까운 더욱 아름다운 글로 재 탄생한 이글은 저 뿐만 아니라 나이든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할 아름다운 수필입니다.
-2014년11월 마지막 날에, 혜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김도향-
가지에 걸려 있는 연줄 들녘에 버려진 헌 신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등대에 부서지는 파도보일 듯 말 듯한 대마도
달빛에 흘러가는 전마선은우리를 슬프게 한다
석양에 혼자 노는 소년 일하며 하품하는 소녀
동생을 업고 가는 아이는우리를 슬프게 한다
양지에 졸고 있는 노인 혼자서 여행하는 여자
허공만 바라보는 남자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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