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0. 19:35ㆍ좋은 말 글
"경주 최 부잣집 가훈"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지만, 경주 최 부잣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부터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이어갔고
마지막으로 1950년에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300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최 부잣집 가문이 지켜 온 가훈은 오늘날 우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1. 흉년에는 땅(남의 논, 밭)을 사지 마라.
2. 1년에 1만석(2만 가마니)이상의 재물을 불리지 마라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4. 사방 100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5. 진사(가장 낮은 벼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6.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책" 중에서 -
경주 최 부잣집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입니다.
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사방에 골고루 뿌리면 소중한 거름이 되는 법이다.”
(경주 최 부잣집의 가훈 해설)
1.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흉년이 들면 수천 명씩 굶어 죽는 시대.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2. 만석 이상의 재산은 만들지 마라.
돈이란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 된다.
멈추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최씨들은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이상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은 소작료 할인이었다.
다른 부자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 선에서 멈췄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팠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쳤다.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나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 부자 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고,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최부자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부자집이라고 소문나니까 과객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있었다.
두 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과객이면 누구든지
이 쌀 뒤주에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뒤주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암시였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과객들은 정보전달자 역을 했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다.
‘적선지가(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했다.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잣집 창고에 쌓인 곡식들은 최씨 일가만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주변이 굶어죽는데 나 혼자 만석군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은
부자 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를 보면 만석꾼 최 부자집은 경주만 의식한게 아니었다.
사방 백리의 범위를 의식하고 살았던 집안이었다.
5.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최 부잣집은 9대 진사를 지냈다. 진사는 초시 합격자의 신분이다.
이를테면 양반신분증의 획득인 셈이다.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집안의 철칙이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돈만 잡고 권력은 포기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깝다고 여겼던 탓이다.
벼슬이 높을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은 높아지고,
한번 휘말리면 집구석 절단 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벼슬의 끝, 그러니까 권력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꿰뚫어 본 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6. 시집온 후 3년간 며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7대 조모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기워 입어서 옷이 두꺼워져서,
서말치 (3말의 물이 들어가는) 솥에 치마 하나만 넣어도 찰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기워서 물에 옷을 넣으면 옷이 불어나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이 집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모두가 영남의 일류 양반집이었다.
본인들은 진사급이었지만, 만석군이다 보니 사돈이 된 집안들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치마양반’이다.
로마 천년의 유지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경주 최 부자집의 유지 비결도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1000년 문명을 지탱한 노하우였던 것이다.
(趙龍憲·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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