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상이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파리의 청중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46년 봄...그의 나이 불과 열한살때였다. 그로부터 50년후인 1896년의 오늘, 생상의 연주가 생활 50주년을 기념하여 데뷔했던 바로 그 자리, 사르 플레이에르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제5번>은 바로 이 연주회에서 있을 생상 자신의 연주를 위하여 작곡된 것이다.
명성과 명예를 모두 얻은 만년의 생상은 일상의 태반을 여행으로 보내며 세계 각지를 둘러보는데, 이런 여행에서 얻은 각 나라 각 도시의 인상을 당연히도 하나하나 그의 작품에 반영한다. 이 피아노협주곡 5번 역시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번에는 이집트 여행의 기념품이라 할수있는 작품이다.
언뜻 고전적인 협주곡의 양식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곡은, 그러나 여러 곳에서 관념 파괴, 형식 파괴의 실험적 시도가 나타난다. 흔히 이집트협주곡 또는 이집트 풍이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실험적 시도에 의한 동양적 색채의 가미에서 기인한다.
특히 2악장 안단테에서는 마치 이집트의 밤의 느낌을 충분히 느낄 만큼의 아름다운 선율을 구사, 이곡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선명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 - 1997)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 - 1997)는 1915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와 역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다고 한다. '독소(獨蘇)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피살되었고 어머니는 독일로 망명하여 리히터는 러시아에 혼자 남게 된다.
양친이 음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터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리하여 15살 때인 1930년, 오뎃사 극장의 연습 피아니스트로 일하게 되었고, 1934년엔 쇼팽의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직업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37년, 비로소 처음으로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위해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겐리히 네이가우스(부닌의 祖父)의 문하에서 수업한다.
네이가우스는 이 나이 많은 제자를 극진하게 가르치고 갈무리 해 주게 되는데 그의 소개로 프로코피에프를 알게되어 그의 소나타 6, 7, 9번을 초연하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1945년, 전 소련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소련과 동구(東歐)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0년, 고소공포증으로 비행기를 타지못하고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여 서방세계 최초의 연주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이 비로소 서방세계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세계적인 명성을쌓기에 이른다.
리히터에 대한 음악가들의 평
○ 반 클라이번(1958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 후)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연주다.
○ 에밀 길렐스(1955년 서방 첫 연주 여행에서)당신들의 칭찬은 정말 기쁘다.하지만 저 산너머 우리나라에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다.그의 연주 솜씨는 나보다 천 배는 더 낫다.
○ 글렌굴드: 흔히 연주가 그룹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첫 부류는 악기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연주가들로 역사적으로 볼 때 리스트나 파가니니 등이 이에 속하는,이들의 특징은 그 악마와도 같은 거장성(virtuosity)에 있다. 이들은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연주가 자신과 악기와의 광계에 몰입하도록 만든다.이와 반대로 두번째 부류의 그룹은, 연주의 메카니즘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을 음악과 직접적으로 연결시켜 그 음악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이들은 연주가 아닌 음악 그 자체를 가지고 청중들과 교감을 이루는데,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이 부류를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연주가라 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악기의 기계적 변화를 무시할 수 있는 연주가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터와 같은 연주가들은 음악적 구조라는 바탕 위에 그 악기와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연주가 자신과 청중들 또한 거장성이나 악기에 대한 피상적 질문에서 벗어나 음악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영적 가치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의 연주가 음악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근거는 연주가들이 결코 베토벤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모차르트를 창조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같은 연주를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더욱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연주를 연결고리로 작곡가와 청중들을 매개시켜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 작품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게 만들 뿐 아니라,종종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작품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그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것은1957년 5월 모스크바 음악원이었다.프로그램은 가장 긴 곡 중의 하나인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로 시작했는데,리히테르의 템포는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중 가장 느렸다.여기서 두 가지 사실만 고백하도록 하자. 첫째 나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반복적 구조를 싫어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특히나 좀 긴 곡이라도 듣게 되면 무언가 불안정하고 어색함마저 느끼게 된다.둘째는 레코드를 통해 음악을 주로 듣지 음악회에 거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리히테르의 첫 프레이즈 연주와 그 느린 템포가 주었던 감동 때문이다.
사실 나는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슈베르트의 반복적 구조에 대한 편견은 이미 사라진 뒤였으며 기껏해야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리히테르에 의해 중추적인 요소로 다가오고 있었다.더우기 곡에 대한 분석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즉흥연주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었는데, 그의 음반을 들을 때도 그랬던 것처럼 바로 그 순간 나는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음악 전달자를 보았던 것이다.
키릴 콘드라신 (Kirill Kondrashin,1914∼1981)
키릴 콘드라신이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빈 필하모니를 지휘, 정경화를 독주자로 하여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녹음한 뒤부터다. 그가 서방 자유세계의 지휘자들처럼 다양한 지휘활동과 레코드 녹음을 할 수 없었다는 취약점 때문에 위대한 거장성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콘드라신은 20세기 지휘사에 결코 빠트려서는 안 될 위대한 지휘자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가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묻혀 지내왔다는 것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지 못하고 전성기를 보냈을 뿐이다.
콘드라신은 소련이라는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기 3년전인 1914년 2월 21일 모스크바의전통적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당대 소련 지휘계의 거목이였던 보리스 하이킨에게 지휘법을 배운 뒤, 음악원 졸업과 동시에 레닌그라드의 말리 가극장 지휘자로 취임하여 1943년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 다음해에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볼쇼이 극장 지휘스탭에 가담했고, 1960년부터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상임이 되어 1976년까지 이 오케스트라를 키우는데 진력했다. 오늘날 모스크바 필이 누리고 있는 명성의 대부분은 콘드라신에 의해서 구축되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후 런던이나 파리 등에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어 자유로운 활동을 하다가 1979년에 갑자기 네덜란드로 망명, 세계의 음악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콘드라신의 네덜란드 망명은 그가 1981년 3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돌연 사망해 버림으로써 불과 2년밖에 활동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콘드라신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을 맡아 말년의 음악 인생을 정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콘드라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들의 관계는 짧은 만남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몇장의 레코드로 남은 기록은 우리 시대의 소중한 유산이 되기에 충분하다.
콘드라신의 지휘는 대체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중후에서 거대한 러시아 대륙의 유장함을 맛보게해준다. 그가 소련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으면서도 말러같은 본격적인 서구음악에 심취했던 것은 매우 독특하다.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서유럽의 오케스트라들과 기념비적인 레코드 녹음이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67년의 길지 않은 생애가 그 가능성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콘드라신은 아쉬움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