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클래식]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Eroica)`- (1)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H.v. Karajan, (2) London Symphony Orchostra / E. Jochum

2013. 2. 5. 19:11듣고싶은 곡

 

Ludwig van Beethoven (1770 ∼1827)

('요제프 칼 슈타이어'의 1820년작 회화)

 

 

Symphony No.3 in E flat major, Op.55

 

"Eroica" 

 

 

[개요]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 내림 마장조(작품번호 55)는 1802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804년에 완성된 교향곡이다. 처음에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기리며 이 곡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으나, 1804년 5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이름을 지워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1805년 4월 7일에 빈에서 베토벤 자신의 직접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곡은, 제1악장 - 알레그로 콘 브리오 (Allegro con brio), 제2악장 - 장송 행진곡: 아다지오 아사이 (Marcia funebre: Adagio assai), 제3악장 - 스케르초: 알레그로 비바체 (Scherzo: Allegro Vivace), 제4악장 - 피날레: 알레그로 몰토 (Finale: Allegro Molto)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과 각 악장별 해설은 별도로 붙인다. 'Eroica'란 말은 영웅(hero)이란 뜻의 이탈리아語이다.

 

 

(1)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cond.Herbert von Karajan

 

 

전곡 연속듣기

 

1악장 : 생기있는 빠르기로(Allegro con brio) 내림 마 장조 3/4

 

소나타 형식. 그러나 규모가 크고 두 개의 주제가 의외로 다양하고 풍부한 악상을 지니며 이들 재료를 낱낱이 구사하고 있다. 1주제는 첫부분의 강력한 두 개의 화음 후에 저음역의 현악기에서 엄숙하게 등장한다. 2주제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클라리넷으로 연주되며 바이올린으로 옮겨간다. 발전부는 매우 정성스럽게 대위법적으로 짜여지며, 극적인 힘을 지니고 커다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공식적으로 제시부의 재료를 다시 출현시키는 재현부 후에 또다른 새로운 발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한 코다가 나오고 이 당당한 악장을 마무리한다.

 

2악장 : 대단히 느리게(Adagio assai) 다 단조 2/4

자유로운 3부 형식. '장송 행진곡'의 악장이다. 현의 주제가 나타나며 장중한 걸음걸이로 나아간다. 중간부는 다장조로 밝아지며, 영웅의 생전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제1부의 주요 선율이 다시 나타나며 그에 토대를 둔 푸가토가 차례대로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다시 주요 선율이 모습을 보이며 슬픔과 체념을 품은 채 곡을 중단하고 인상깊게 마무리한다.

 

3악장 : 스케르초. 빠르게 생기있게(Allegro vivace) 내림 마 장조 3/4

3부 형식. 1부는 빠른 스타카토의 움직임으로 시작하며, 차츰 힘을 증대시켜 간다. 중간부 트리오는 호른의 선율로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다시 1부가 반복된다.

 

4악장 : 매우 빠른 속도로(Allegro molto) 내림 마 장조 2/4

같은 베이스의 선율형을 자유롭게 몇 차례 반복하여 그 위에 변주를 쌓아나가는 파사칼리아와 비슷한 형태를 취한다. ff로 격렬히 연주되는 서주 후에 피치카토의 1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베이스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끝곡에 베이스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윽고 가볍고 평온한 2주제가 등장한다. 전체적으로는 푸가토와 그 밖의 대위법적인 기교들이 나타나며 커다랗게 정점을 향해 진행한다. 거기에 긴장이 풀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코다로 전곡을 마무리하게 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 ~ 1989, 오스트리아)은 20세기 중반을 이끈 세계적인 음악가(지휘자)이다. 어려서 피아노의 신동으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고, 이후 1927년 독일 울름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는 전후시기에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의 한 명이며 세계에서 가장 음반 녹음을 많이 한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35년간(1955-1989) 지휘하였다.

 

 

(2)

London Symphony Orchestra

cond.Eugen Jochum

 

1악장 : 생기있는 빠르기로(Allegro con brio)


 

2악장 : 대단히 느리게(Adagio assai)

 

3악장 : 빠르게 생기있게(Allegro vivace)

 

 

4악장 : 매우 빠른 속도로(Allegro molto)

 

 

오이겐 요훔(Eugen jochum 1902-1987, 독일)은 데뷔 후 뤼베크, 만하임, 뒤스부르크, 베를린 등을 거쳐 1934-49년은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극장과 함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다.

 

1949 - 60년은 바이에른 방송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1-64년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었으며, 그 후는 한때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맡았지만 자유로운 입장에서 객원지휘를 했다. 1977년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로부터 계관지휘자의 칭호를 받았다.  

 

남독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실하고 견실한 음악을 만들었으며, 레퍼토리는 넓지 않지만 조형성이 탄탄한 작품을 특히 즐겼다. 그의 특질이 가장 잘 나타난것은 브루크너를 지휘했을 때고, 1982년 함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제8번 교향곡(F장조, Op.93)과 1986년 암스트레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의 제7번 교향곡(A장조, Op. 92)에서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3)

Philadelphia Orchestra

cond., Riccardo Muti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1941~ ,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 오페라의 음악감독)는 파워와 추진력이 뛰어난 지휘자 중 하나이다. 특히 오페라 지휘에 있어서는 그 세대의 여타 지휘자들보다 우위에 있을만큼 좋은 솜씨를 보여준다. 1967년 귀도 칸텔리 국제 지휘자 콩쿨에서 우승함으로써 본격적인 지휘의 세계로 들어서기에 이른다. 이후 1969년 피렌체의 5월 음악제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며 본격 프로 지휘자가 되었고, 1972년에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1973년에는 영국의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80년 9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1986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3번 내림 마장조 "영웅(Eroica)" Op. 55

 

이 곡은 1804년 봄에 완성 되었다. 베토벤이 음악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모방적인 음악을 만들던 시기를 벗어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곡은 그만의 강한 개성과 힘의 균형이 훌륭하게 나타나는 곡이다. 후에 바그너는 이 곡의 4개의 악장을 "활동, 비극, 정적의 경지, 사랑"이라고 평하면서 참된 베토벤의 모습이 이 곡 안에 다 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인간의 해방을 부르짖던 베토벤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곡이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의 혁명에서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일개 포병 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이 반란을 평정하고 국내 최고 사령관 이 되었다.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의 정신에 불타 있던 베토벤은 프랑스 혁명을 흥미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대사와 대사관의 비서이자 바이 올리니스트였던 루돌프 크로이쩌로부터 프랑스에 자유와 질서를 가져온 나폴레옹의 업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플라톤의 '공화국'을 숙독한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시대의 영웅의 자태를 보여준 나폴레옹을 자신의 작품으로 찬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33세 때인 1803년 여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하여 1804년 봄에 완성시켰다. 스코어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 '루비트비히 반 베토벤'이라 적어 이를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 내려고 할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이 빈에 퍼졌다. 이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사본의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저 사나이도 역시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것이야."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이후 다시는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도 안 했다는 그는 2년 뒤 이 곡을 출판하면서 "한 사람의 영웅을 회상하기 위해 작곡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7년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비로소 "나는 그의 결말에 어울리는 적절한 곡을 써 두었다"라고 했다는 베토벤. 이는 이 작품의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들러의베토벤 전」에 의하면 베토벤은 프랑스 초대 집정관이었던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이 곡의 부본을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려고 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5월 18일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해서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버린 악보를 마루바닥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 표지에는, "Bonaparte, Ludwing van Beethoven"이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코르시카 섬 태생의 일개 포병사관이었던 나폴레옹은 1795년 10월에 의회군을 지휘, 이 대혁명에 참가하여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일약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마침내는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신출귀몰의 위력을 떨친 나폴레옹이야말로 베토벤의 눈에는 자유정신과 인간 해방의 기수로서 새 시대를 고하는 세기적 영웅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1798년 2월부터 4월까지 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베토벤과 개인적 친분을 가지게 되면서 그는 베토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베토벤은 그를 통해 영웅 나폴레옹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혁명의 풍운아, 영웅에게 바치는 교향곡이 탄생된 것이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1784-1838)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그 녀석도 결국 속물이었군. 그 녀석도 역시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권리를 짓밟고 그 누구보다도 더 지독한 폭군이 되겠지!』하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2년이 지나서 출판된 파트 악보에는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이탈리아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어로 된,한 사람의 영웅에 대한 추억을 기리기 위해서」부제가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곡을 나폴레옹 일대기의 표제악으로 생각하고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교향곡 「제2번」까지 희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소위 희유성은 이「제3번」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 한층 더 진실한 도덕성이나 윤리성 같은 그 어떤 힘을 이「제3번」은 지니고 있다. 베토벤 자신도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는 이 곡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다. 제3번」은 확실히 장대한 곡이다. 시간적으로도 종래의 상식을 벗어나 50분이나 소요되는 긴 곡이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며 1806년에 출판된 악보 중의 제1바이올린 파트에는, 『 이 교향곡은 일반 다른 곡들보다 길므로 연주회에서 후반부 보다는 가능한 전반부에서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 즉 서곡 1곡에다 아리아 1곡, 또는 협주곡 1곡 다음에 연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청중들은 앞 부분에서 이미 지쳐버리게 되므로 이 곡의 효과는 그만큼 상실하게 된다.』라고 기술했을 정도다. 심지어 전술한 클레멘트 주최의 초연에서는 제2부의 첫 곡목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 위키, 브리태니커, 세광음악출판사 해설서, 여러 웹문서를 인용, 참고하였음>

 

 

Compiled by <http://blog.daum.net/seonomusa>

 

 

출처 : 서노무사실무노동법연구실
글쓴이 : 미학(서영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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