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Prokoflieff 1891∼1953)와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1882∼)를 가리켜 신고전주의 작가라고 하지만 실은 서로 거리가 멀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로코피에프가 보다 모짜르트적인데 비하여 스트라빈스키는 보다 바하적이고,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이 선율적인데 비하여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은 율동적이다. 또한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이 상식적이라고 한다면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은 매우 개성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프로코피에프의 <피터와 늑대>,<키제중위 조곡> 같은 것을 근대음악 내지 현대음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도 조성(調性)이 뚜렷하고 전통적인 화성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트라빈스키의 <아플론 뮤사제트>나 <칸타타>에도 흥미가 없다. 이것은 너무도 시들어 버린 장미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높이 평가하는 작품은 프로코피에프의 <무용조곡 강철의 걸음>,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결혼>,<병사의 이야기 등이며 그 중에서도 <결혼>은 가장 나의 맘을 끈다. 나운영
환경변화와 정치적 어려움에도 꿋꿋했던 작곡이념
프로코피에프는 제정 러시아 시대에 태어나 혁명을 피해 미국·프랑스 등지로 망명했다가 스탈린의 서슬이 퍼렇던 1934년, 18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색다른 인생 경로를 밟은 작곡가다. 그는 종교음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장르의 작품에 손을 댔으며, 자신의 최고의 것을 피아노 음악·발레음악·영화음악에 쏟아 넣었다.
독창적인 작곡 스타일을 확립한 러시아 시기
프로코피에프는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피아노곡 ‘인디안 갈롭’이라는 제목으로 소곡을, 1897년에는 피아노를 위한 소곡들을, 아홉 살부터 열 살 무렵에는 ‘거인’과 ‘무인도에서’라는 두 개의 규모가 작은 오페라를 작곡했다.
일찍부터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드뷔시나 스트라우스·레거·쇤베르크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는데, 그의 연주자로서의 평가는 그 힘과 테크닉으로 청중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급속히 높아졌다.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함께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1~12)에 의해서 프로코피에프의 양식은 확실하게 확립됐다. 그는 이들 곡에서 힘찬 리듬과 타법, 느닷없이 혀를 찌르는 듯한 격렬한 화성에의 기호, 이런 명확한 힘과 민속적인 선율의 감흥이 느껴지는 슬프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서정성과의 대조 등을 나타냈다.
그는 1914년 런던 여행 때 디아길레프와 알게 되고 그로부터 러시아적인 주제나 선사시대의 주제를 가진 발레를 의뢰받게 된다. 이것은 ‘알라와 롤리’로 실현됐다. 이 작품은 스키타이의 신화에서 제재를 취해 시인 세르게이 고로데츠키(Sergei Gorodestki)가 각본을 쓴 것인데, 디아길레프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것을 다시 손질해 ‘스키타이 모음곡’을 작곡했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힘찬 이 작품은 전편을 환상적인 꿈이 넘치는 힘찬 크레셴도로 끝맺는다. ‘스키타이 모음곡’은 거대한 편성의 관현악을 사용했으며 범 몽고적인 사조의 계보 속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대한 프로코피에프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디아길레프의 거절은 프로코피에프로 하여금 그와의 협력을 단념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새로운 발레의 주제를 찾게끔 유도했다. ‘어릿광대’는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민요집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현되기까지에는 6년이나 걸리게 된다.
1916년부터 1917년에 걸쳐서 프로코피에프는 거의 모든 장르의 작곡에 손을 대게 된다. 이 시기에 오페라 ‘도박사’(1917)를 완성하고, ‘피아노 소나타 제3번’과 ‘피아노 소나타 제4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20곡으로 된 소곡집 ‘잠깐 사이의 환영’(1915~17) 등을 작곡했는데, ‘잠깐 사이의 환영’은 쇼팽의 전주곡이 낭만주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지위를 그 시대의 음악 속에서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에 프로코피에프는 ‘고전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매우 대조적인 두 개의 작품 ‘고전적 교향곡’과 칸타타 ‘그들은 7인’(1917~18, 개정 1933)은 콘스탄틴 발몬트(Konstantin Balmont)의 러시아 혁명의 격동에 대한 예감 속에서 씌어진 ‘칼데아의 기원’을 토대로 한 것으로서 ‘스키타이 모음곡’의 미학에 이어져 있다.
이 무렵 프로코피에프는 막심 고리키와 마야코프스키를 알게 되지만 몇 달 뒤에는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적으로는 혁명가였으나 정치에는 거의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활동의 장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때까지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프로코피에프는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생각을 굳히고 교육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Lunacharski)에게 미국으로의 망명 허가를 신청했다. 글 ·정순도 숙명여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i Prokofiev ;1891 - 1935)
제정러시아 시대에 태어나 혁명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했다가 18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소련으로 가자 동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승리하고 찬양 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인 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악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고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모더니즘에 결별을 선언한 것은 전 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지칠줄 모르는 창작의욕으로 현대 보기 드문 건강한 음악을 쓴 작곡가로 평한다. 작품으로는 영화음악 ‘키제중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피터와 늑대’ 오페라 ‘전쟁과 평화’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교향곡 제5번’ ‘고전교향곡작품 25’등이 있다.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는 성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서 미아스코프스키(Nikolay Myaskovsky, 1881~1950)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음악원 시절부터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1)을 비롯한 많은 곡을 작곡하였고, 1916~1917년에는 몇 년 뒤에 올 신고전주의를 예시하는 중요한 작품 <고전 교향곡(Classical Symphony)>을 썼다. 이 곡은 소나타 형식의 제1악장, 3부분 형식의 제2악장, 가보트와 트리오의 제3악장, 론도의 제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투명한 짜임새 때문에 고전주의 교향곡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신고전주의 경향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고, 교향곡 제2본(1924~1925)같은 경우에는 매우 불협화음적인 제1악장이 있다.
1918∼1936년 동안에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작곡과 연주활동을 하였고, 이 무렵 오페라 <3개의 오렌지를 위한 사랑(The love for three oranges, 1919)>, 관현악 모음곡 <키제 중위(Lieutenant Kije, 1934)>, <피터와 늑대(Peter and the wolf, 1936)>들을 작곡하였다. 1936년 귀국 후에는 소비에트가 요구하는 노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의 곡들은 여전히 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거부당하였기 때문에 연주 허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수정을 해야 했다.
고대 러시아의 태양제와 강한 원시주의를 담아 파리에서 작곡한 관현악곡 <스키타이 모음곡(Scythian suite, 1914)>은 초기 민족주의 성향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7부분으로 구성된 칸타타 <알렉산더 네프스키(Alexander Nevsky, 1938)>나 오페라 <전쟁과 평화, 1941> 등에도 민족주의적인 러시아 정서가 섞여 있으며, 교향곡 제5번에서는 전통형식과 동기발전 기법을 사용하면서 조성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을 구사하지만 민속선율과 강한 리듬, 갑작스러운 전조, 바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 등을 통해서 민족주의와 고전주의, 그리고 현대적 특징을 포괄하는 그의 음악은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