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종교 개혁 300주년 축제를 위해 작곡된 두번째 교향곡이나 출판이 늦어져 제5번이 되었다. 제1악장엔 루터파 교회의 답창인 <드레스덴 아멘>이, 제4악장엔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의 악절이 포함되어 <종교 개혁>이란 표제가 붙게 되었다.
멘델스존 Mendelssohn. J. L. F
멘젤스존은 1809년 2월 3일 독일 함부프크에서 태어나, 1847년 11월 4일 역시 독일의 라이 프찌히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난 독일 낭만파 작곡가이다. 멘젤스존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작곡가로서, 낭만주의 음악이 개화한 중엽에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유태인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상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부유한 가족 환경에서 자랐고, 또한 일생을 경제적인 구애나 빈곤을 모르고 지냈다. 이러한 환경이 음악가로서의 멘델스존에게 플러스가 되었는지 또는 마이너스가 되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그의 기질과 더불어 그의 음악이 밝고 경쾌한 반면, 중후한 맛이나 심각성이 없다는 대조적 반응이 이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 는 없다. 또한 대부분의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과거의 전통이나 질서에 대해 부정적 태도나 저항을 하는 사례에 비하여 그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기존형식을 아무 주저없이 받아 들이 는 보수적인 작곡가였다.
1818년에 최초로 공개 연주를 했고, 1819년에는 최초의 작곡을 했다. 같은 해에 그는 그의 작품에 낭만적 색채를 준 베버와 만났으며, 당시의 저명한 음악가들을 방문했다. 1822년에는 몇 개의 기악곡, 성악곡, 오페라와 출판되지 못한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다. 1826년에 《한 여름밤의 꿈》의 서곡이 작곡 연주되고, 27년부터는 베를린에서 청강(聽講)하여 높은 교양을 쌓았다.1829년에는 바흐 서거 후 처음으로 《마태 수난곡》을 지휘 상연하여, 바흐의 진가를 인정시키려는 주창자(主唱者)로 활약하여, 당시의 예술에 새로운 방향을 터놓았다. 공개연주가로서의 생활은 모쉘레스의 초대로 1829년 런던을 방문한 것으로 비롯하였으며, 그의 교향곡 제1번 cm. op.11을 지휘하여 호평을 얻었다. 이리하여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런던에서 대륙으로 퍼졌으며, 피아니스트로도 높이 평가받았다. 또한 스코틀랜드에의 여행으로 《스코틀랜드 교향곡》(1831~42)과 《핑갈의 동굴》(1830~32)의 영감을 얻었다.
1830년에는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런던에서 구상하였던 《종교개혁 교향곡》을 완성하였고 이듬해 로마에서 로마 대상을 받고 유학하고 있던 베를리오즈와 만났으며, 《스코틀랜드 교향곡》과 《이탈리아 교향곡》에 착수했다. 1831년에 귀국하여 파리, 도이치 각지와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으며, 파리에서는 리스트를 방문하고 쇼팽을 만났다. 1832년에는 두 번째 런던 방문에서 자작을 지휘 연주하고, 최초의 《무언가》 제1권을 냈다. 1832년에 베를린에 돌아와서 자작의 관현악을 지휘 연주했다.
1833년에는 세 번째의 런던 방문에서 《이탈리아 교향곡》을 지휘한 뒤, 듀셀돌프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곧 이를 사직하고 1835년에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광범위한 음악적 교양과 지휘자로서 드문 재능과 작곡가로서의 가치가 인정되어, 유럽의 음악중심지인 이 곳에서 최대의 평판을 얻었다. 1836년에 오라토리오 《파울로》를 완성, 바그너와 만나고 1837년에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1840년에 버킹검 음악제에서 교향곡 《찬가(讚歌)》 op.59를 작곡 지휘하였다. 1841년에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음악부의 지휘자가 되고,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학교를 창설했다. 1842년에는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 교향곡》op.56을 작곡 지휘했다. 1844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베를린에서 은퇴, 1846년에는 9회째의 영국 방문에서 돌아와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직을 양보하고 작곡에 전념했다. 1847년에 10회째의 런던 방문에서 돌아와서는 신경의 과로에다 병이 겹쳐 라이프치히에서 11월에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