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6. 09:06ㆍ산청명승
(대원사 이미지-2010.5.9)
(아래는 수집, 정리한 관계자료임)
삼장면 유평리에 위치. 기암괴석을 감도는 옥류소리, 울창한 송림과 활엽수림을 스치는 바람소리, 산새들이 울어지저귀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자연의 대합창을 들을 수 있는 계곡이 대원사계곡이다.
30여리에 이르는 대원사계곡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봉 하봉을 거쳐 쑥밭재와 새재 왕등재 밤머리재로 해서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계류가 암석을 다듬으며흘려내린다.조그만 샘에서 출발한 물길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신밭골과 조개골,밤밭골로 모여들어새재와 외곡마을을 지나면서는 수량을 더해 대원사가 있는 유평리에서부터 청정 비구니가 독경으로 세상을 깨우듯 사시사철 쉼없이 흐르는 물소리로 산중의 정적을 깨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대원사계곡을 일컬어 남한 제일의 濯足處로 꼽으면서"너럭바위에 앉아 계류에 발을 담그고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먼데 하늘을 처다보며 긴 인생의 여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으랴!" 했다.
행정지명을 따 유평계곡이라 하지 않고 통상 대원사계곡이라 부르는 연유가 된 대원사 역시 수난의 지리산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대원사는 옛스러움과 정갈한 산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정 비구니 도량 답게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인 주변의 경치하며 대웅전 앞의 파초, 원통보전(圓通寶殿)에서 산왕각(山王閣)에 이르는 돌계단과 절 뒤편의 차밭,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힘찬 글시가 보이는 요사채는 피서지 사찰답지 않은 청결함을 보여준다. 대원사계곡에 있는 선녀탕 세신대 세심대 옥녀탕 등의 지명도대원사의 탈속한 기풍과무관하지 않은듯 하다. 그러나 대원사계곡의 깊은 맛은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에 있지 않다. 대원사계곡에서 유래한 `덕산 유덕골'과 `골(계곡)로 갔다'란 말 속에 우리 민족의 현대사와 지리산을 바라보는 민초들의 심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뜻으로 흔히 쓰는 `골로 갔다'는 말 역시 골짜기의 깊음과 골짜기에 들어갔다 하면 죽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느낄 수 있다.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토벌하기 위해 골짜기에 들어갔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빨치산이 되었건 골짜기에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왔기 때문에 `골짜기 갔다'는 말은 곧 `죽는다'는 뜻이고 `골로 갔다'로 줄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원사계곡은 그 골짜기가 깊다보니 역사의 변환기 때마다 중요한 피난처이자 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60년대까지만 해도 화전민이 있었다.1862년2월 산청군 단성면에서 시작, 진주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한 농민항쟁에서부터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변혁에 실패한 사람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며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일제시대때는 항일의병의 은신처가 되었고, 한국전쟁에 이어 빨치산이 기승을 부릴 때에는 낮에는 국군의 땅이 되고 밤에는 빨치산의 해방구가 됐다.
이런 사연을 가진 대원사계곡도 이젠 자동차로 한달음에 계곡 끝인 새재마을까지 오를 수 있으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계곡은 여름이면 더위를 씻어주는 피서지이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가는 길일 뿐이다. 계류의 물소리와 바람이 흔들고 가는 나뭇가지의 몸짓에 한 많은 역사의 넋풀이를 보는 발걸음이 있다면 옛 화전에서 나는 유평 꿀사과의 향기도 입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