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클래식] 미하일 글링카, 비올라 소나타 라단조(Glinka, Sonata for Viola & Piano in D minor)

2014. 7. 18. 16:37듣고싶은 곡

 

Mikhail Glinka(1804 ~1857, Russia)  

Sonata for Viola & Piano in D minor, G.iv3

 

 

 

 

 

Yuri Bashmet, Viola

Mikhail Muntian, Piano

 

 

Glinka/ Sonata for viola & piano in D minor(I ~ II)

 

 

 

I. Allegro Moderato (09:58)

 

 

 
 
II. Larghetto ma non troppo (08:23)

 

이 작품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단조는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의 창시자인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링카(1804 ~1857)의 마지막 작품으로 비록 미완성으로 2악장까지 밖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곡 가운데 한 곡이다. 이곡은 글링카가 1825~8년 사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 시절에 작곡하였다. 이때는 글린카가 고전파의 작품에 대한 탐구에 열을 올리던 시기로서, 형식에 대한 탐구에서 잠시 벗어나 여유로운 마음에서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어렵지 않게 마음에 와 닿는 주제를 피아노가 먼저 제시하고 곧이어 비올라가 그 선율을 되받아 연주해가는 1악장은 애틋한 감정으로 충만하다. B flat 장조의 2악장은 어딘지 슈베르트를 연상케 하는 아름답고도 따스한 분위기이다. 피아노의 주제를 받아, 비올라가 노래를 하고 피아노가 아름답게 감싸준다. 평온한 정적을 깨는 듯한 피아노의 화음을 로 노래는 숨이 가빠지는 듯 애절해진다. 피아노도 더욱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음형으로 고조되어간다. 글린카는 1828년에 이곡의 1악장만을 완성했고, 2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두었다. 2악장은 보리소프스키(Borisovsky)가 완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웹사이트>

 

미하일 글링카(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는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의 창시자이다. 그는 스몰렌스크 주의 노바스파스코예의 귀족출신으로 페테르스부르크의 귀족학원을 다녔고 그 사이에 음악 전반에 걸쳐 마스터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빈, 베를린, 파리, 스페인 각국을 몇 차례 여행하여 민족색이 짙은 스페인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하였으며, 그것을 소재로 한 작품도 썼다. 그리고 귀국한 뒤에는 러시아 음악과 러시아 문학의 기반에 서서 《이반 스사닌》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등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그것이 뒷날의 「러시아 5인조」와 현대 러시아 음악에 영향을 미쳐 음악의 국부(國父)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글링카는 녹턴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존 필드에게도 잠시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필드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였던 칼 마이어에게 배우는 한편, 바이올린을 요셉 뵘에게 배웠으며 작곡은 독학으로 공부했다. 체신부의 관리 생활을 5년쯤 한 후에 독학으로 작곡가로 전향했는데, 이점에서도 '5인조' 작곡가들의 모범이 되었다. 1830년부터 약 4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의 음악계를 견학하고, 베를린에서 덴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1834년에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온 그는 종래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음악에서 탈피한 참다운 러시아의 국민 가극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1836년, 32세 때 폴란드 침입군에 대한 이반 스사닌의 애국적 이야기를 제재로 한 최초의 가극 《황제에게 바친 목숨》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에 황실 예배당의 지휘자로 추천되어, 제 2 의 가극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착수했으나, 1847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가극은 의외로 평이 좋지 않았지만, 그 관혁악법은 리스트나 베를리오즈로부터 높이 평가되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작곡한 연주회용 관현악곡 《카말린스카야》나 《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에는 그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글링카는 '러시아 국민악파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는 19세기 전반의 대작곡가인데, 그것은 순수한 러시아 음악을 만들려는 이상에 불을 붙인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창시한 러시아 국민 음악은 다음 세대인 무소르그스키, 보로딘 등 '5인조'의 작곡가들에게 계승되어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글링카는 말년에 교회합창곡 작곡을 계기로 유럽의 교회선법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깊은 연구를 위해 1856년 베를린에 건너가 글링카에게 올바른 음악이론과 예술적 개념을 심어준 옛 스승 지그프리트 덴(Siegfried Dehn, 1799-1858)을 찾아 과거의 작품들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전에 병을 얻어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이렇듯 탐구열이 깊었던 글린카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케루비니 등 고전파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도, 스스로는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연구를 늘 미흡하게 생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요 작품으로, 가극《황제에게 바친 목숨》(1836),《루슬란과 류드밀라》(1847), 관현악곡《카말린스카야》(1848),《아라곤의 호타》(1845),《마드리드의 여름밤의 추억》(1848) 등이 있다. <음악의 역사(음악사 대도감), 1996.한국사전연구사 및 웹사이트 참고 재편집>

 


 

유리 바쉬메트(Yuri Bashmet, 1953~ 러시아)는 비올라 연주자로는 유일하게 비르투오조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연주자이다. 그가 음악에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언어학자였던 어머니였고 그가 음악가로 성장하는데도 줄곧 어머니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그가 18세 되던 해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보리소프스키(Vadim Borisovsky)를 사사하며 비올라를 시작하였는데, 이어 러시아 최고의 대가 드루치닌(Feodor Druzhinin)에게서 배우게 된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음악원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는 이어서 뮌헨에서 개최한 국제 비올라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 자신의 이름이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그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그 연주력을 인정받았고, 1993년 바비칸 센터에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와 4회에 걸친 연속적인 콘서트를 열며 바슈메트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아울러 보로딘 사중주단과의 연주 등 실내악 연주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Compiled by <http://blog.daum.net/seonomusa>

출처 : 서노무사실무노동법연구실
글쓴이 : 미학 서영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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